8번의 만기인사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내일 아침에 출소합니다. 곧 좋은 일이 있어서 사회에 나오시기 비랍니다. 건강하십시요.”
10년 20년씩 징역살이를 하는 장기수들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이러한 인사로 떠나 보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아마 다시 들어 오지 않겠지,
저친구는 아마 한두번은 더 들어오겠지…….

별로 오래지 않아서 그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접견대기실에서 그를 봤다느니, 미결사에 이발나갔던 이용훈련생이 그를 봤다느니…….
그리고 그런 소문은 머지않아 그가 형이 확정되어 기결로 넘어오게 됨으로써 확인됩니다.
때로는 지난번 징역에 출역했던 공장에 다시 출역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지난번에 살았던 바로 그 방으로 다시 배방되어 들어 오는 경우마저 드물지 않습니다.
면목없어하는 그를 핀잔도 하고 위로도하면서 다시 함께 섞여 살아 갑니다.
지난번 징역인지 이번 징역인지 구별되지도 않은 채 살아 갑니다.

그리고 어느덧 만기가 되면 다시 만기인사를 합니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내일 출소합니다. 곧 좋은 일이 있어서 사회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건강하십시요.”
똑같은 사람과 똑같은 인사를 또 나눕니다.
장기수들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맞이하고 떠나보냅니다.
마치 감옥의 주인입니다.

내가 대전교도소에 살았던 15년동안 7번의 만기인사를 나눈 사람이 있습니다. 그이는 말하자면 15년동안에 7번을 들어온 셈입니다.
지금은 징역이 비싸져서 1, 2년 장역이 드물지만 그때만해도 2년이면 징역이 많은 편이었습니다. 6월, 10월짜리도 많았고 웬만한 경우는 1년이나 1년6월정도였습니다.

징역초년시절 나는 만기자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속으로 짐작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다시 들어 올사람인가, 다시는 들어 오지않을 사람인가를 속으로 매겨두는 것입니다. 개중에는 한두번 더들어오겠지 싶은 사람도 없지 않았고 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던 사람도 많았습니다.

징역살이는 그 사람을 가장 깊이 꿰뚫어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나 마음씀씀이에서부터 그가 지닌 기능이나 습관, 그의 과거사와 집안내력 친척과 친구들의 면면에 이르기까지 바깥사회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까지 자연히 알게됩니다.
그사람의 잠꼬대까지 알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나는 나의 짐작에 대하여 상당한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는 들어 오지않으리라고 매겨 두었던 사람이 또 들어 올때,
내가 느끼는 실망과 회의는 매우 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만나 어색한 악수를 나눌때의 나의 심정은 착찹합니다.
그래서 해를 더해갈수록 나는 그사람에 대한 점수를 짜게 매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을 훨씬 엄격하게 하여 틀림없다 싶은 사람에 대해서도 다만 다시 들어 올때까지의 기간을 다소 길게 잡아 줄뿐 여간해서는 기대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7번의 만기인사를 나눈사람이 있듯이 대부분의 기대가 빗나가기 마련이었습니다.

사람이 소위 범죄를 하게되는 까닭이 그 사람의 사람됨됨이에 있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그 사람의 처지에 있다는 것을 알기 까지는 내게는 참으로 많은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졌지만 나는 징역초년을 남한산성육군교도소에서 보냈습니다. 육군교도소는 군인들이 수형생활을 하는 곳이고 당연히 재소자들은 20대의 젊은이들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그때는 나도 20대였습니다.
폭행 상해 살인사건도 더러 있고 월남전에서는 다소 유다른 사건도 있기는 하였지만 재소자의 거의 대부분이 군무이탈 휴가미귀 초소근무이탈등이었습니다. 애인이 변심했기때문이기도 했고 과음때문이기도 했고 병영의 질서나 비합리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사건은 대부분이 그 개인의 성격과 연관되어서 이해되었습니다.
그개인의 성격상의 결함이 그 미숙함으로 말미암아 서투르게 나타난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건과 성격을 직선적으로 연결시켜 이해하는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형이 확정되어 민간교도소로 이송되어 맨처음 깜짝 놀란 것은
교도소에 노인 재소자가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육군교도소에서는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던 노인재소자들이 그리고 많았습니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젊은 사람들의 경우와는 달리 노인의 경우는 그 사건과 그 사람의 성격상의 결함을 직선적으로 연결시켜 이해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였습니다.
저 노인은 어떤 인생을 살아왔기에 저 나이에도 징역살이를 하는가하는 의문이 계속 남았습니다.

한마디로 노인의 징역은 그 노인의 인생과 관계되어 설명되어야 할것같았습니다. 차츰 차츰 알게된 것이지만 평생을 거의 반이상이나 장역살이로 채워온 노인들의 인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것이었습니다.
만주로 일본으로 농사일에서 도시의 품팔이로 떠도는 동안 한번도 따뜻한 정처를 얻지 못하고 떠밀리고 쫓기며 살아온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작고 짧은 성공의 시절이 있었는가하면 길고 어두운 좌절의 세월을 걷기도 하였습니다.

노인들의 징역살이에서는 그 개인의 성격상의 결함을 느끼기이전에 그의 인생을 읽게 되고 그의 인생에서는 그 인생이 걸어가야했던 그 세월을 돌이켜보게되고 그 세월에 점철된 근대사의 파란만장한 역사의 얼룩을 대면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극히 개인적인 일이라하더라도 개인에게 책임을 물어야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은 법입니다. 저 혼자의 힘만으로 꽃을 피우는 푸나무가 없듯이 저 혼자의 잘못으로 떨어지는 꽃잎도 없기 때문입니다.

만기인사를 나누며 우리는“마음을 잡으라”는 말 대신에“자리를 잡으라”는 말을 더 자주 나눕니다.
자리가 먼저인지 마음이 먼저인지 알 수 없지만
너나없이 마음붙일 자리가 없는 사람들이고보면
아무래도 우선 자리 하나가 무엇보다 절실합니다.
한포기 꽃나무나 마찬가지입니다. 설 땅이 그리운 법입니다.
恒産이 없이 恒心이 있을 수 없다는 옛말드 그렇습니다.

만기인사를 나눌때 우리의 마음은 쓸쓸합니다.
다시 들어와서 만날때 우리의 얼굴은 쓸쓸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만나고 헤어짐이 이와 같습니다.
지금도 문득 문득 그이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지금은 어느곳에서 누구와 쓸쓸한 만기인사를 나누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그이와 따뜻한 악수를 다시한번 나누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