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을 비운 그릇처럼

1981년4월27일 대전에서

인생살이도 그러하겠지만 더우기 징역살이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단촐한 차림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였읍니다.
그러나 막상 이번 전방(轉房) 때는 버려도 아까울 것 하나 없는 자질구레한 짐들로 하여 상당히 무거운 이삿짐(?)을 날라야 했읍니다.
입방(入房) 시간에 쫓기며 무거운 짐을 어깨로 메고 걸어가면서 나는 나를 짓누르는 또 한 덩어리의 육중한 생각을 짐지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내일은‘먼 길’을 떠날 터이니 옷 한 벌과 지팡이를 채비해 두도록 동자(童子)더러 이른 어느 노승(老僧)이 이튿날 새벽 지팡이 하나 사립 앞에 짚고 풀발 선 옷자락으로 꼿꼿이 선 채 숨을 거두었더라는 그 고결한 임종(臨終)의 자태가 줄곧 나를 책망하였읍니다.
섭갹담등 즐풍목우(섭갹擔등 櫛風沐雨), 나막신에 우산 한 자루로 바람결에 머리 빗고 빗물로 감던 옛사람들의 미련 없는 속탈(俗脫)은 감히 시늉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10여 년 징역을 살고도 아직 빈 몸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있으면 없는 것보다 편리한 것도 사실이지만 완물상지(玩物喪志), 가지면 가진 것에 뜻을 앗기며 물건은 방만 차지함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마음 속에도 자리를 틀고 앉아 창의(創意)를 잠식하기도 합니다. 이기(利器)를 생산한다기보다‘필요’그 자체를 무한정 생산해 내고 있는 현실 속에서는 오연(傲然)히 자기를다스려 나가기도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읍니다. 그러나 그릇은 그 속이 빔(虛)으로써 쓰임(用)이 되고, 넉넉함은 빈 몸에 괴는 이치를 배워 스스로를 당당히 간수하지 않는 한, 척박한 땅에서 키우는 모든 뜻이 껍데기만 남을 뿐임이 확실합니다.

화용이는 울음을 저 혼자서 감당하는 것이 도리어 대견스럽게 생각됩니다. 자전거로 울면서 동네를 도는 것이 무슨‘데모’라고는 할 수 없지만.
아버님 다녀가셨읍니다. 박선생님도 뵙고 여러가지 이야기 들었읍니다. 가내 평안하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