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문도득(文道得)노인은 이름때문에 별명이‘문도둑’이다.
그는 이름을 지어준 할아버지를 원망했다.
道得‘길에서 얻는다’는 것은 곧 도둑질이라는 것이다.
얻을 得자 대신 큰 德였다면 설마 도둑이야 되었겠느냐는 것이다.

절도 전과가 20개가 넘었기 때문에 설령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별명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젊은 사람들도 그가 이름타박을 할 때마다 그렇게 그를 핀잔했다.
그러나 정작 문노인은 농담으로 그러는 것이었다.
문노인은 그런 핀잔쯤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가끔 창밖으로 먼 눈을 주며 혼자 생각하는 눈빛이 될 때
나는 그의 준렬하고도 엄격한 옆모습을 보기도 하였다.

문노인이 출역하고 있는 목곡장에서
그를 대수롭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족도 없고 편지 한장 보내주는 사람도 없는,
이를테면 세상에서 잊혀진 사람이다.
차라리 끼니때마다 밥 한가다씩 나오는 감옥이 더 나은 곳인지도 모른다.
공장에서도 잊혀진 사람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시답잖은 뒷일이나 거들다가
일이 없을 때는 후미진 구석에 돌아 앉아서
나무젓가락이나 깎았다.
칫솔 한 개라도 신세진 사람에게 갚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는 한다하는 목수였다.
그가 일배운 박목수 이야기를 할때는 깊은 눈이 되면서 빛이 났다.
행복했던 시절이었고 자랑스러운 시절이었다.

언젠가 목공장에서 제일가는 목공기술자 서너명이 붙어서
뒤주를 만들고 있었다. 교도소 간부가 주문한 것이었다.
문노인은 내게 가만히 말했다.
저건 뒤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뒤주밑에는 모름지기 다듬잇돌이 훌렁훌렁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뒤줏발이 저렇게 낮아서야 어디 뒤주랄 수가 있냐는 것이었다.
그가 젊어서 훌륭한 목수였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한번은 내게 무얼 설명하면서 땅바닥에다 집을 그렸다.
그때 내가 받은 충격은 잊을 수 없다.
순서였다. 그가 집을 그리는 순서였다.
먼저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의 순서로 그렸다.
처음 한동안은 무슨 그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붕부터 그려서 내려오는 우리들의 순서와는 거꾸로였다.
그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다.
실로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었다.

집을 지붕부터 그릴 수는 있어도
지붕부터 지을 수는 없는 법이다.
내가 받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나의 서가(書架)가 무너지는 듯한 낭패감이었다.

이론과 실천의 통일에 대하여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문노인은 이론도 실천도 더구나 그것의 통일따위 알리가 없다.
그러나 그는 몸으로 알고 있었다.

문노인의 서툰 집그림앞을 떠나지 못하고
쪼그리고 앉은 내가 한없이 초라하였다.

함비자(韓非子) 외저설(外儲說)에 차치리(且置履)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정(鄭)나라에 차치리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어느날 장에 신발을 사러가기 위하여 본을 떴다.
이를테면 종이위에 발을 올려 놓고 그리는 것이다.
한자로는 그것을 탁(度)이라 한다.
그러나 그가 막상 장에 갈 때는 그만 깜박 잊고 이 탁을 집에다 두고 갔다.
신발 가게에 가서야 탁을 집에 두고 온 사실을 깨닫고
탁을 가지러 도로 집으로 달려 갔다.
탁을 가지고 다시 장에 와서 신발가게를 찾았으나
장은 이미 파하고 말았다.
사연을 들은 사람들이 그에게 말했다.
“탁을 가지러 집까지 갈 필요가 어디있소 발로 신어 보고 사면 될일이 아니요.”
차치리가 대답은 다음과 같다.
“아무려면 발이 탁만큼 정확할라구요”

문노인이 발로 신어 보고 신을 사는 사람이라면
나는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었다.
한비의 이 우화 한토막은 학문하는 사람들의 이마를 찌르는 일침이다.

탁과 족
이론과 실천
종이와 망치
교실과 공장
옷과 사람
화폐와 물건
임금과 노동력……

과학 특히 사회과학의 공부는 대부분이
한비의 우화에 나오는 '탁'에 관한 공부이다.
책이 그렇고 교실이 그렇다.
생생한 자연을 두고, 치열한 현실을 두고 우리는 책을 상대한다.

책속에서 만나는 것은 이러저러한 개념이다.
‘식물’이라는 단어는 하나의 개념이다.
실제로 산야에 있는 것은 소나무, 버드나무,잣나무 사철나무이다.
식물은 없다.
‘물가’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이다.
시장에 있는 것은 구두값, 쌀값, 집값, 임금, 이자, 이발요금이 있을 뿐이다.
식물이나 물가는 탁이다.
종이 위에 있는 것이다.
교실에 있고, 우리의 머리속에 있을 뿐이다.

개념은 세상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때문에 본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차치리가 본을 뜬 탁에는 우선 차치리의 발가락이 그려져있지 않다.
발가락뿐만 아니라 발의 두께, 발톱, 피부빛깔도 탁만으로서는 알 수 없다.
탁에 그려진 것은 다만 발바닥의 크기일뿐이다.
많은 것들이 생략되어 있다.
개념은 관념이고 관념은 실재의 추상이다.

1+1= 2 라는 사실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세상에 1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사과 한개 나무 한그루 토끼 한마리 돌멩이 한개
하나의 주식회사, 노동자 한 사람이다.
1이란 극도로 추상화된 개념입니다.
1이란 개념은 그것이 나무이건 사과이건 노동자이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사과 한개 + 토끼 한마리 = 2라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지 난감하다.
사과 한개 + 사과 한개 = 사과 두개 라는 사실에서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도대체 사과 두개가 나란히 있다는 사실에 과연 2라는 의미가 있는가.
두개의 사과를 먹으면 한개를 먹을 때보다 두배의 만족이 있는가.
두 사람이 일하면 과연 한 사람이 할 때에 비하여 두배의 작업량을 하게 되는가.

생생하고 거대한 자연과 복잡하고 치열한 사회의 복판에서 우리가 배우는 극도로 추상화된 관념이 과연 얼마만큼의 세상을 담아낼 수 있는가.

반대로 너르고 복잡한 세상을 시시콜콜 일일이 어찌다 말할 수 있는가.
3백년 묵은 소나무의 잎사귀를 어찌 다 셀 수 있는가.
더구나 그것이 한 그루 소나무가 아니라
유구한 역사와 치열한 갈등을 내부에 담고 있는 세상임에랴.

어쩔 수 없이 잎을 따고 가지를 쳐서 간추리게 된다.
우리는 겉에 걸친 옷보다는 그 알몸에 주목하고,
그 말보다는 그가 걸어온 길을 보고 그를 판단한다.

枝葉을 떨어내고,
현상적인 것, 우연적인 것, 상대적인 것, 조건적인 것들을 사상하지 않을 수 없다.
개념적 사고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피카소는 초록색하나로 캔버스를 칠하고 그것을 난초라고 한다.
마르크스는 만약 사물의 현상형태와 본질이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불필요할 것이라고 한다.
한마리의 제비를 보고 천하에 봄이 왔음을 알 수 있고
혁명의 거대한 파노라마를 오선지위에 옮겨 놓을 수 있다.

현상에서 본질로, 본질에서 현상으로 넘나들 수 있는 열린 생각을
사회과학도는 갖추어야 한다.
이것이 곧 예술적 상상력과 철학적 추상력을 길러야 한다.

풍부한 예술적 상상력과 냉정한 철학적 추상력이야말로
한마리의 제비를 보고 천하의 봄을 읽으며
삼라만상의 이치를 단 한 자로 적어 道라 하기도 한다.

부분과 전체
현상과 본질
특수와 보편
나무와 숲
구름과 바다
종이와 망치
교실과 공장
탁과 족…….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탁이 아닌 족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발은 풍부한 리얼리즘을 담고 있으며
확실한 사회성을 담고있기 때문이다.
발의 사회성은 한마디로 각자가 서 있는 사회적 입장이다.
어떠한 사회적 입장에 발딛고 서 있는가,
어떤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가,
자기의 집이 어디에 있으며 자기의 이웃은 누구인가 ?
이것이 발의 사회성이다.

이것이 우리의 상상력과 우리의 추상력을 결정한다.
발은 곧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결국 발을 주목하고 발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탁을 가지러 달려가는 그 때 마저도 깨닫지 못하는 발.
바로 그 발이 딛고 선‘곳’을 깨달아야 한다.

추운 겨울아침 어렵게 얻어 온 뜨신물 반 대야를 가운데 놓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네개의 발을 담글 때,
물이 적지 않을까 하던 걱정을 순식간에 밀어내고
대야에 가득히 차오르던 뜨거운 충만을 나는 기억한다.
동상박힌 발가락 훈훈히 풀어주는 겨울아침의 족탕을 행복해하며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름다운 산천경개를 바라보며 찬탄할 때에도
발은 어두운 신발속에서 체중을 감당하며 땀을 흘린다는
어느 시인의 애정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발은 우리의 삶을 떠 받치는 주춧돌이다.
문노인이 가장 먼저 그렸던 바로 그 주춧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