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지‘이론’편집위원장 정운영 교수와의 대담


정운영:형장에서 사라진 사람도 있고 아직 옥고를 치르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에게 느낀 '인간'이 있다면 가령 어떤 것이겠습니까?
신영복:양심이나 사상에 대한 단죄, 더구나 사형은 실정법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그런 실정법이 있는 나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대사에는 바로 이러한 법에 의하여 수많은 목숨이 처형되고 옥고를 치르고 있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쓴 초만영어(草滿囹圄)란 붓글씨가 제게 있습니다. 그 글씨를 쓸 때의 심정은 옥중에 사람은 없고 풀만 그득한 세월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이나 평생동안 옥고를 치르고 있는 사람들도 당자 스스로는 그 비극을 귀중하게 정리하고 승화시키고 있는 것을 수없이 목격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개인이 그러한 비극을 승화시키고 있다고 하여 그것이 객관적으로 용인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운영:그 사건에 연루되어 고통을 함께 한 동지로소 가깝게 지내는 몇몇분의 근황을 들려주십시오.
신영복: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대부분 건강이 좋지 않거나 와병중입니다.검도나 무예를 지도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신학을 공부하거나 여성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구와 가깝게 지낸다는 사실이 어느 날 갑자기 공포로 변하고, 그것 때문에 전전긍긍해야 하는 세상에서 그 가까움이란 마음뿐이지요.
정운영:통혁의 뿌리가 아직도 남아 있다는 '소문과 추리'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신영복:모든 변혁운동의 뿌리는 그 사회의 모순구조 속에 있습니다. 답변이 됩니까?
정운영:그 말씀을 들으니, 마르크스주의를 배태한 상황이 변하지 않는한 마르크스주의를 넘어설 수 없다는 사르트르의 말이 생각나는 군요. 통혁에 대한 세간의 평가에서 가장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어디입니까?
신영복:통혁에 대해서는 공안사건 기록에서부터 단행본 소설까지 출판되어 있을뿐 아니라, 최근에는 박사학위 논문이서도 다루어지고 있습니다.세간의 평가는 물론이고 역사적 평가까지도 그것은 부단히 다시 쓰여지는 것이고 또한 다시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
정운영:선생님 자신은 그 사건이 역사에서 어떻게 기록되기를 바랍니까?
신영복:사건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커녕, 하물며 자기의 이름 석자도 자기가 바라는 대로 기록되지 않습니다. 특별히 바라는 바가 없습니다. 화가들이 어떤 모습을 그리든 상관없이 남산은 남산의 온당한 모습으로 남게 되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지나면 뼈만 남는 법입니다. 그리고 뼈가 더 정확합니다.
정운영:한껏 욕심을 부려 인생을 80이라고 해도, 앞의 20년은 부모의 덕으로 살고 뒤의 20년은 자식의 덕으로 지냅니다. 결국 가운데 도막 40년이 자기 자신의 인생일 텐데, 선생님은 그 중의 절반을 형옥에서 보냈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 선생님 자신이 얻은 것과 잃은 것을 어떻게 정리하시겠습니까?
신영복:가장 어려운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자리에서 잃는 것과 얻는 것의 변증법에 대하여 이야기 할 수는 없겠지요 다만 저는 우리시대의 가장 첨예한 모순의 한 복판을 몸으로 체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체험은 체험 그 자체보다는 물론 그것으로 부터 이끌어 내야 할 반성이 더 중요합니다. 저는 20여년의 수형생활을 통하여 크게 두가지 점에서 배운 바가 많습니다.
첫째는 해방전후의 역사를 역사로서 이해해오던 관념성에서 어느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해방전후의 격동속에서 살아온 많은 분들과 함께 징역을 살면서 그 시대를 보다 생생하게 복원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구빨찌 신빨찌에서부터 만주땅 함경도 제주도에 이르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삶은 그야말로 피가 통하고 숨결이 배어 있는 역사 그 자체였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가지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들게 살아 온 사람들과 나눈 인간적 이해와 공감입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를 그 모순구조 속에서 인식할 수 있도록하는 확실한 토대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이해, 이것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정운영:그 장기수들의 생활 가운데 특히 깊은 인상을 받은 대목이 있다면, 몇몇 단면만이라도 들려주시지요.
신영복:편지(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도 짤막하게 썼습니다만, 바깥에 아직도 나이 어린 자녀를 남겨주고 위암으로 옥사하신 분이 계셨습니다.그분의 마지막 말씀이 그 자녀에게 남기는 유언이었는데,"꽃과 나비는 부모가 돌보지 않아도 저렇게 아름답지 않느냐"는 것이었어요. 저는 이 말 속에서 무척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징역 초년을 그런대로 어렵지 않게 넘길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에 징역을 사셨던 분들의 덕택입니다. 그분들은 접견도, 서신도, 영치금도 없는 개인적으로 매우 형편이 어려운 분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는 사회에서도 완벽하게 잊혀진 분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훌륭한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좌익수에 대하여 유독히 반감을 가진 일반 수형자들로부터도 "사상이 나빠서 그렇지, 사람은 법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 여덕의 그늘에서 징역을 시작한 셈이지요.
정운영:아물지 않은 상처를 다시 건드리는 질문입니다만, 출감하기까지 뉴학했던 '인생대학'은 어디 어디였습니까?
신영복:1968년 7월말에 지금은 독립공원이 된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 후 1개월만에 역시 지금은 헐린 필동의 수도경비사령부 지하 영창으로 옮겨졌습니다.1969년 1월에 역시 지금은 없어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로 이송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970년 9월에 기결수 교도소인 안양교도소로 이송되었는데, 그해 겨울을 거기서 지내고 1971년 2월에 사상범 집결교도소인 대전시 중촌동 대전교도소로 이감되었습니다. 1984년 4월에 대전시 대정동의 신축교도소로 이사를 했습니다. 1986년 2월 전주교도소로 이송되기까지 15년을 모스크바라는 악명으로 불리는 이 대전교도소에서 살았습니다. 88년 8월에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하였습니다.
정운영:형옥이 어디 편한 데가 있겠습니까만은, 그래도 어디가 가장 힘들었습니까?
신영복:징역살이는 처음이 힘들고 또 자리 잡기까지가 힘듭니다.자리잡는 다는 것은 동료들과의 인간관계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정운영:수형 생활에서 특별히 배우거나 익힌 일이 있습니까?
신영복:양재공 양화공 염색공 페인트공등의 기능을 익혔습니다.자신있게 무슨 기술자라고 말씀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교도소 기술 자체가 아무래도 그 수준이 저급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교도소에서 10여년이상씩 기술을 익힌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출소후 그 기술로 생업을 꾸려가기에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언젠가 한번은 보세가공품의 견본을 제작해 보이기 위해서 소위 사회기술자가 교도소에 와서 미싱을 밟은 적이 있었는데, 한마디로 교도소 기술자들 사기가 뚝 떨어졌습니다. 사회의 양화공이 입소해서 함께 일한 적이 있는데 저의 일솜씨를 보더니 사회의 "시다"수준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지금도 집에서 간단한 미싱일은 제손으로 합니다.
정운영:세계에 그 유래가 없는 사상전향 제도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신영복:사상전향제도는 한마디로 일제의 잔재입니다.뿐만 아니라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헌법에도 위배되는 제도입니다. 위헌 소청이 제기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70년에 형이 확정되면서 가족들의 권유에 따라 전향서를 제출하였습니다. 그 권유 이외에도 몇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만, 당시는 그것을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후 징역을 사는 동안 비전향이라는 이유때문에 재구속되거나 평생을 옥중에서 보내고 있는 장기수 분들을 목격하면서, 그 전향제도에 내재한 정치적 의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효율성 이라든가 현실성 등 이른바 실용성이라는 미명하에 다반사로 원칙이 방기되는 세태 속에서는, 자신의 신념과 원칙을 견지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운영:출감 이후의 가족관계는 어떻게 변했습니까?
신영복:여든다섯이신 아버님과 이제 두돐이 채 안된 아들과 그리고 직장에 나가는 처, 이렇게 네식구입니다. 어머님은 출소 이듬해인 89년에 돌아 가셨습니다.
정운영:선생님의 사정으로 보아 결혼에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듯하고, 더구나 선생님을 반려로 맞은 사모님께서는 한층 더 대단한 각오가 필요했을 것 같습니 다. 결혼 이야기를 좀 들려주십시오.
신영복:출소 후 집안사정으로 봐서 결혼을 안할 수는 없는 형편이었습니다.저와 저의 차지를 잘 이해하는 몇분이 소개를 했습니다.한번 만나고 나서 즉시 결정을 했습니다. 결혼 문제를 어떻게 그처럼 쉽게 결정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더러 받습니다. 그럴 때 저는 성질이 고약한 사람과도 교도소에서 한 방에서 사이 좋게 살았다고 대답하지요. 사실 중매하는 사람이 중립인 경우는 없거든요. 저는 그 분들이 제편이라고 생각하고 쉽게 결정했습니다. 현제는 각자가 자기 분야를 갖고 있는 셈이어서 서로 덜 기대는 편입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