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지‘이론’편집위원장 정운영 교수와의 대담


정운영:선생님의 그러한 '희망사항'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의 갈등은 상당히 심각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는지 원칙이나 자세에 대한 충고 한마디 해주시지요.
신영복:방금 말씀 드렸듯이 '관계설정'을 해야지요. 여러가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끌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관계만이라도 유보해 두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관계마저 상처내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이것은 논의를 조기에 종결기키거나 논의를 밖으로 갖고 나가기 때문입니다. 논의를 조기에 종결시킨다는 것은 관계설정을 하지 않은 채 끝낸다는 의미이고, 바깥으로 갖고 나간다는 것은 그 갈등을 대중적으로 확대 한다는 뜻이지요. 통전(統戰)전술에서 이른바 "주도권을 장악하라.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독자성을 견지하라"는 원칙이 있는데, 이것은 자칫 잘못 해석될수 있는 명제라고 생각합니다.
정운영: 조금 더 부연 하시겠습니까?
신영복: 이를테면 가장 '과학적'인 등산 코스가 이론적으로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이 '과학적'이란 용어에 담긴 교조성입니다. 오늘 등산의 목적과 성격이라든가, 함께 산을 오르는 일행의 성별, 연령, 체력 등에 따라 그 과학성이 얼마든지 재규정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정운영: 좀 부드러운 얘기로 화제를 바꾸어서, 대학 시절의 로맨스가 있으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범위 내에서 한번 공개하십시요.
신영복:징역사는 동안, 연애라도 했었더라면 하는 후회를 한 적도 없지 않았습니다. 상당히 진전될 수 있었던 몇몇 사람들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함께 옥살이하는 사람가운데는 젊은 처를 바깥에 둔 사람도 있고 약혼녀나 애인이 접견오고 편지보내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부러울 때도 있었습니다만 막상 그 사람들이 애태우는 심정은 옆에서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였습니다. 저는 없어서 서운하기는 해도 차라리 홀가분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학교다닐 때는 친구들도 그렇고 선후배들도 어쩐 일인지 저한테 애인이 있는 것으로 지레짐작들을 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학교의 유씨 아저씨와 같이 가끔 극장구경을 가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공교롭게도 애인과 함께 구경온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 그래서 우리가 극장에 갈때면 으례 또 누구 아는 학생이 오지 않았나하고 목을 뽑고 두리번거리며 찾아내는 버릇이 생겼는데, 정작 발각(?)된 학생들은 매우 부끄러워하고 어색해 하는 것 같았어요. 그런 걸 보고 나니, 저렇게 부끄럽고 어색한 일을 내가 쉽사리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어요.
정운영:이왕 내친 김에 선생님의 여성관을 한번 들려주시지요.
신영복:계수(計數)로 제시하기는 무리이긴 합니다만, 저는 '여성관'이라고 할 때, 물론 '남성관'이라고 할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만, 그 '관'의 대상이 되는 부분은 10%정도라고 생각합니다. 나머지 90%는 남성과 여성에 공통되는 인격 일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조시대에는 물론 그 비율이 지금과는 달랐겠지요.
이 10%에 대한 '관'이 흡사 전체에 대한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에, 무리인줄 알면서도 편의상 10%라고 밝혀두고 싶습니다.
일반적으로 여성관이라고 할 때 지금까지는 그 바탕에 전근대적 사회관, 전통적 여성관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전제되어 있고 그것을 기준으로 여성관을 펴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90년대의 신식민지 국가독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러한 전통적 갗기준들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남아선호 경향만하더라고 지금은 전혀 다른 동기에서 추구됩니다. 여아에 비하여 남아가 이윤율이 높은 투자대상이라는 것이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미라고 할 경우, 물론 그것이 전인격의 10%라고 할지라도 이제는 그것의 실체가 사용가치와 미의 결합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교환가치와 미의 결합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교환가치와 미의 관계는 전자가 후자를 규정합니다.
여성미의 경우 교환가치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변화는 남성보다는 여성의 경우 더 신속하고, 나이 많은 사람보다는 젊은 사람의 경우가 더 신속합니다.
정운영: 아주 재미있고 중요한 지적입니다.
신영복:노동력의 경우는 남자쪽의 상품화율이 높지만. 인격적인 면에서는 여지쪽의 상품화가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테면 의상이 인격을 대체하지요. 이야기의 방향이 질문의 의도와 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사회면혁을 이미지의 변화로써 대체해버리는, 그래서 사회의 모순을 은폐해가는 상품생산사회의 당연한 귀결입니다. 이러한 물신성, 상품성에 대한 비판이 여성관의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운영:대학시절의 이야기는 이쯤으로 끝내고, 다시 딱딱한 얘기로 돌리겠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한 어떤 특별한 동기가 있었습니까?
신영복:대학원 진학은 제게 상당히 중요한 기로였습니다.저의 동기들은 현재 대개 기업이나 은행 관공서등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습니다. 졸업 후 사회에 나간다는 것이 당시로서는 대체로 그러한 코스를 밟아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길을 걷게 되면 아무래도 양심문제가 걸릴 것 같았어요. 대학에 진학하고 난 후에는 국민학교 시절의 자의식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처지였습니다. 역전된 처지는 제게 심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나 자신이 살아가야할 진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에서의 위치설정에 대하여 상당히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원 진학의 또 한가지의 이유는 읽고 싶은 책이 많이 밀려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청년학생운동과 기층민중운동과의 관계에 대해 여러가지 논의가 있었는데, 그 논의에 대한 나자신의 결론에 의하더라도 학교에 남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운영:대학원 재학시절에는 주로 어떤 공부를 어떻게 했습니까?
신영복: 경제사, 이론경제, 경제정책의 순서로 공부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책은 주로 선생님들한테서 갖다 보았습니다만, 학교 도서관의 서고에 있는 마르크스-레닌 전집류와 고려대학교의 아세아문제 연구소의 장서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정운영:석사학위 논문으로는 어떤 주제를 잡았습니까?
신영복:제목은 "봉건제 사회의 해체에 관한 연구"입니다만, '노동력의 사회적 존재양식을 중심으로'라는 부제가 딸려 있습니다. 처음에는 "노동력의 사회적 존재양식에 관한 연구-봉건제 사회의 해체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제출했습니다만 지도교수인 최문환 학장이 난색을 표해서 제목도 바꾸고, 내용도 일부 삭제하고, 주(註)도 다시 정리해서 결국 우여곡절 끝에 지도교수도 박희범 교수로 바뀌었습니다. 주(註)를 다시 정리한 것은 제가 간접인용한 부분도 있었고 당시로서는 출처를 표시하기가 곤란한 책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봉건제는 분석하지 못하고 서양경제사를 중심으로 주로 스위지(P.Sweezy), 돕(M.H.Dobb), 다카하시(高橋幸八郞), 스즈끼(鐸木)등 기존의 연구논문들을 기초로 하여 봉건제의 해체과정을 노동력의 사회적 존재양식이라는 시각에서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운영:지금 다시 생각할 때. 그 논문이 함축하는 결론 가운데 혹시 한국자본주의의 발정에 적용되거나 접맥될 만한 부분이 있습니까?
신영복:별로 없을 듯합니다. 이건 논문과는 관계없는 이야기입니다만, 잘 아다시피, 소위 사회성격 논쟁에서 주된 시각이 '자본의 성격'에 촛점이 마추어져 진행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물론 자본의 성격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이나 봉건제 사회의 성격과 그 해체 과정이 유럽과 판이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노도력이라는 관점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노동의 성격, 노동력의 사회적 존재양식이라는 시각은 자본주의를 역사적 관점에서 인식할 수 있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사회의 분석이 경제주의에 빠지는 것도 막아주리라고 생각합니다.
정운영:대학이나 대학원 시절 미르크수주의를 비롯한 진보적 이론을 접하게 된 어떤 인연이나 계기가 있었습니까?
신영복:당시 마르크스-레닌 이론에 관한 연구는 철저히 터부였고 책도 별로없었습니다. 그리고 6.25로부터 당시에 이르는 광범한 사상의 초토화 지대가 가로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보다는 해방전후의 상황과 시간적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에 마르크스-레닌 이론에 대한 관심 자체는 여러가지 형태로 산재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제3세계의 사회주의적 개발방식과 계획경제의 성과가 진보지향적인 학생들의 의식을 과잉규정했던 면도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치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분단문제에 대한 관심은 당연히 사회주의 이론을 망라하게 됩니다. 해방 이후 정권의 정통성도 없었고 식민지 경제구조도 그대로 확대재생산되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부정 부패의 만연, 그리고 광범한 빈곤의 축적은 자본주의적 개발방식의 한계와 모순을 쉽게 느끼게 하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소위 후진국개발이론은 선진국에서 국제경제론의 일환으로 다루어지던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치. 경제적인 동기뿐만아니라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에서는 정치경제학을 비롯하여 철학적 논리, 역사적 관점, 인간의 소외문제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지적 광맥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정운영:위에서 사회주의가 '과잉규정'한 면이 있다고 자계의 말씀을 하셨는데, 당시 마르크스주의를 대했던 선생님의 자세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신영복:방금 말씀드린 바와같이 마르크스주의를 자본주의 분석에 있어서 가장 체계적인 이론으로, 가장 정합적인 실천과학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때까지의 독서에서 항상 문제점으로 느꼈던 철학의 빈곤, 이론의 관념성, 가치의 물신성 등에 관하여 뛰어난 통찰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대상으로한 19세기의 서구 자본주의와 우리나라의 자본주의는 그 성격과 지위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이 창조적으로 수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베트남의 민족해방이론,중소 이념논쟁, 마오이즘 등 당시에 이미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회주의 이론이 전개되기도 했으니까요.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