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지‘이론’편집위원장 정운영 교수와의 대담


정운영:비록 농민문제가 중심이 되었던 초보적인 수준이나마 그 계급적인 관점과 민족적인 관점이 서로 대립했던 계기나, 혹은 그들을 통일시키려는 시도 같은 것은 없었습니까?
신영복:대립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닙니다만, '반제통일'(反帝統一)과 '반파쇼민주'의 대립구조는 물론 있었습니다. 쟁점 자체는 지금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문제들을 놓고 열띤 논의들을 했었지요.이러한 대립구도를 지양하기 위해서 사회계급 분석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대개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정운영:4.19당시에는 어떤 일을 했습니까?
신영복: 당시 저는 대학 2학년이었습니다. 4.19데모는 주로 문리대쪽에서 조직하였기 때문에 상과대학에서는 사전조직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저는 저학년인데다 아르바이트하느라 참여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시위에는 물론 참가했지요.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국회의사당앞에서 연좌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경무대앞 효자동 전차종점에서는 이미 발포가 시작되어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었습니다.그때 고등학생 한명이 달려와서 피묻은 러닝셔츠를 펼쳐보이며 울면서 외쳤습니다. 텅빈 국회의사당앞에 앉아서 뭘 하느냐는 거였어요.그래서 우리들사이에서는 경무대로 밀고 가자느니, 아니다 가서 개죽음 당할 필요없다느니 설왕설래하고 있데는 갑자기 뒤에서 "저게(피묻은 셔츠) 어째서 개죽음이냐!"는 고함소리가 났어요. 돌아보았더니 의외에도 가까운 친구였어요. 그래서 더욱 충격이엇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경무대쪽으로 갔어요. 저도 학교에서부터 줄곧 저와 함께 스크럼을 짜고 시위에 참가했던 친구를 따라 경무대로 향했습니다. 그때 그의 애인이 달려와서 그의 팔을 잡고 매달렸습니다. 저는 붙잡는 애인이 없어서 경무대로 갔었지요. 저희 선배 한 분이 그곳에서 숨졌습니다.
정운영:붙잡는 애인이 없었다는 것은 유감입니다만, 아마 붙잡는 애인이 있었어도 경무대로 달려갔으리란 생각이 드는데요. 학과공부 이외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신영복:써클운동에 열심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써클에서 논의한 주제들은 분단문제, 미국의 한반도 전략과 신식민지지배, 매판자본등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에서 부터 제3세계문제, 세계사, 한국근대사등 잡다할 정도로 광범한 것이었습니다. 대체로 전위운동에 필요한 의식을 공유하려는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정운영:당시의 은사들 가운데 특별히 기억하는 분이 있습니까?
신영복:저는 특별한 한 사람의 영향을 집중적으로 받았다기보다는 여러 선생님들의 영향과 애정을 고루 받았습니다. 후에 서울대 총장이 되신 최문환선생님, 충남대 총장을 지내신 박희범 선생님, 총리를 역임한 이현재 선생님, 나중에 기업으로 나가신 홍성유 교수님, 사회대 학장을 지낸 임종철 교수님 등 여러분입니다. 그리고 강사로 철학을 가르친 권세원교수님도 책을 많이 주셨습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줄곧 느끼는 일입니다만 인간적인 면에서 늘 과분한 애정을 받아 항상 빚진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연구실을 사용하기도하고 선생님집에서 밥도 먹고 심지어 잠도 잤습니다. 지금의 학생들로서는 누리기 어려운 일들이지요.
그러나 당시 제가 고민하던 문제에 대해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던 사람은 선생님들 보다는 오히려 선배와 후배들이었다고 기억됩니다. 연구실을 이웃해 있던 안병직 선배와 신용하 선배, 신문편집을 맡았던 장종록 선배, 그리고 연구실과 쎄미나 써클을 통하여 열띤 토론을 했던 후배들이었습니다.
부담없는 토론은 그 과정을 통하여 문제가 논리적으로 정리될 수 있게 하고 사고의 폭도 넓혀준다고 믿습니다.
정운영:은사나 선후배 이외에 달리 기억할 만한 분은 없습니까?
신영복: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이 한분 계시는데, 학교의 수위인 유씨 아저씨입니다. 제가 대학 3,4학년과 대학원 2년을 줄곧 학교 연구실에서 기거하다시피 생활했기때문에 매우 가까워진 분입니다. 밤중에 유씨아저씨 대신 수위 모자를 쓰고 손전등을 들고 교정에 들어와 있는 아베크족(주로 후배들이지만)을 쫓아내는 장난을 함께 하기도 하였습니다. 유씨 아저씨는 고상( 高商)시절인 일제때부터 학교에 계신 분으로 국대안(國立大學案) 반대운동, 6.25당시의 학교 이야기도 들려 주시고 당시 교수들의 이야기며 심지어는 현재 교수들의 학생 시절의 면모까지 소상하게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가운데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옛날에는 대단한 학생들이 참 많았는데 그런 학생들은 거의가 죽었거나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자기는 지금도 학생들을 보면 장차 어떤 사람이 될 지 알 수 있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정운영:선생님의 장래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예언했습니까?
신영복:저의 장래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듣지못했습니다.
정운영:학회, 연구회, 과외활동 등 선생님이 참여했던 일들을 생각나는 대로 들려주시지요. 말씀을 드리고 보니 어째 말투가 꼭 조서 받는 식이 되어버렸는데, 이거 죄송합니다.
신영복:아니 괜찮아요. 하도 많이 당해봐서... 상과대학 내에서는 경우회 회원이었고 교지인 <상대평론>의 편집위원, 상대신문사 기자였습니다. 당시 대학의 분위기는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어느정도의 이념성을 가진 학회및 학생활동은 4.19이후 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4.19이후인 3학년때부터 학회.써클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자연히 후배들의 쎄미나를 지도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상과대학 이외에는 고려대, 연대, 이화여대 등의 쎄미나 써클에 참여하거나 그를 지도하기도 하였고 농촌학원, 대학생 종교단체, 공장야학에도 직접.간접으로 관계하였습니다.
정운영:말씀 마지막 부분의 공장야학이란 무엇입니까?
신영복:제가 관여하고 있던 기독교학생 서클에서 공장야학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중소섬유업체였는데 노동야학은 아니고 학원야학의 성격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의 생활과 정서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시도에 불과했습니다. 70년대의 노동현장에 투신하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징역 속에서 들었는데, 매우 부럽고 반가웠습니다.
정운영:후일 문제가 되기도 했던 경우회에 대해 설명해주시지요.
신영복:경우회는 상과대학 경제학과의 비교적 진보적 성향의 학생서클입니다. 회원 상호간의 토론과 연구는 물론, 총회 및 연구발표회를 통해 선배들과 연계되고 또 그 지원을 받기도 했니다. 제가 경우회에 가입한 것은 3학년 때였습니다. 저는 4기 회원이었습니다만 당시 4기회원의 모임은 거의 없었고,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저는 1-2학년의 세미나를 지도하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제가 1961년에 입회하여 1968년 구속당시까지 관여하였기 때문에 저의 구속과 함께 연루된 회원도 있었고, 다른 많은 회원이 연행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요즈음의 학번 계산 방식으로 하면 제가 59학번인데, 언젠가 89-90학번이 경제학과 학생들이 집으로 놀러 와서 알게 되었습니다만, 현재의 '경제학과 노래'가 그때의 경우회 회가(會歌)입니다. 1기 회원의 음대출신 부인이 곡을 붙이고 노랫말은 제가 지은 것입니다.
정운영:그 작사 솜씨를 한번 공개하시지요.
신영복: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아마 '찬 이성'과 '더운 가슴'이란 말이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경제학자인 마셜(A.Marshall)의 한 구절을 번역한 것이지요. 기회가 닿으면 저도 그 가사 한번 다시 보고 싶습니다. 지금 그 가사르 대하면 무척 부끄러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수준이 그랬습니다. 자기의 글이나 글씨는 그 장점보다는 결함이 먼저 눈에 뜨이는 법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좋은 노래가 얼마나 많습니까?
정운영:60년대의 서울상대 출신 가운데 지금 '현장'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여럿입니다. 혹시 김근태나 장명국에 대해 기억이 남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신영복:김근태와 와 장명국은 65,6학번이었다고 기억됩니다. 장명국은 1.2학년때 부터 자신의 이념적 입장을 비교적 분명하게 밝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구속되면서 조사를 받는 등 고생도 하고, 그 후로도 그일 때문에 여러가지 애로가 많았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김근태는 제가 가지고 있는 책들도 빌려 읽을 정도로 매우 학구적이었고 문제의 핵심에 다가가는 능력이 돋보였다고 기억됩니다. 제가 쎄미나를 지도하던 당시는 두 사람 모두 1,2학년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활동을 하기 이전이었습니다. 그때의 세미나는 근대경제사, 즉 자본주의 성립사를 주제로 하였습니다만 토론과정에서는 헤겔을 비롯하여 고리끼 에서부터 쇼스타코비치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문제들을 다루었습니다. 대담자인 정운영교수도 학번은 다르지만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생각되는데요.
정운영:저는 경우회의 회원은 아니었고, 그제나 이제나 철이 안들어서...
아무튼 선생님이 중심이 되었던 당시의 그 분위기에 휩싸이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제법 출세를 했을 텐데요.
신영복:하하 이걸 어쩌지요. 이제 와서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나 그건 나 때문이 아니라 각자의 팔자 때문입니다. 개인의 팔자만이 아니라 민족의 팔자도 그 속에 들어 있기는 하지만...
정운영:60년대 후반에는 한국사회연구회를 중심으로 김승호나 김병곤 같은 출중한 후배들이 나왔습니다. 한 켐퍼스에서 책상을 나란히 놓고 공부한 이들이 지금은 상당히 다른 정치적 견해를 지니고 있는 현실에 대해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신영복:변혁운동에 참여한 후배들간의 정치적 견해 차이는 이를테면 서울상대 출신 전체의 시회적 입장이나 견해 차이에 비하면 거의 문제가 안될 정도라고 보아야겠지요. 불론 변혁운동에 뛰어든 경제학과 출신들의 자세가 동년배의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다소 비타협적인 면도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 차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방법상의 문제이고 전술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일반적으로 '차이'가 '다양성'이라는 형태로 유연하게 연대되지 못하는 것은 변혁운동의 전체역량이 미숙하고 취약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말하자면 그 운동 역량의 현상형태에 불과한 것이지요.
정파(政派)중심 단계의 분산성은 다른 나라의 운동사에도 나타났었습니다. 어쨌든 변혁역량이 확실한 지도구심을 구축할 수 있을 정도로 장성하지 못하고 있는 데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은 그 단일한 본질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다양한 측면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견해나 입장차이는 그것이 적대적인 것이 아닌 한, 길게 보아서 그것이 오히려 풍부하고 유연한 대응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차이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러한 차이들간의 관계설정이라고 생각합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