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지‘이론’편집위원장 정운영 교수와의 대담


정운영: 청소년기의 자화상을 그린다면 한 마디로 어떤 분위기를 띠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영복: 3형제중 둘째가 대체로 그러하듯이 집에서보다는 바깥에서 더 인기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형과 다투면 동생이 형한테 대든다고 야단맞고 동생과 다투면 동생 하나 거두지 못한다고 야단맞는 게 둘째입나다. 그래서 집안에서는 별로 주목 받지 못하고 바깥에 친구가 많은 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의 장서를 읽는 누님들과 형님을 따라 그 뜻도 모르면서 비교적 조숙한 독서를 하기도 했습니다.
정운영: 아버님의 장서와 그 '조숙한 독서'의 내용을 공개하시지요.
신영복: 박계주의 <순애보>, 이광수의 <흙>이나 <유정>같은 소설은 국민학교 때 읽었습니다. 아버님 서가에는 유학(儒學)관계 서적이나 동양고전이 많았습니다만, 이시첸코의 <철학사전>, 보차로브의<세계사교정>, 전석담 허동등이 번역한 <자본>1권도 있었습니다.
정운영:상업고등학교로 진학하게된 특별한 이유나 동기가 있습니까?
신영복: 실업계인 부산상업 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은 저의 자형이 그 학교의 교사로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모님께서 둘째까지 서울 보내서 유학시킬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무엇이 되고 싶다거나 무슨 일을 하겠다는 특별한 포부는 없었습니다. 주산과 부기과목에 도무지 흥미를 느낄 수 없었고, 좀더 본질적인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정운영:그 당시에 생각했던 '본질적인 공부'란 어떤 것이었습니까?
신영복:그렇게 물으니 제가 '본질적'이란 말을 잘못 사용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청소년기에 느끼는 본질이란 것이 뭐 대단한 것일 수는 없지만,당시에는 싸르트르의 책을 학교에 가지고 오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그렇듯이, 저도 막연한 희망이지만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요.
정운영:일찍부터 문학적 재질이 상당했던 듯한데, 혹시 백일장같은 데 참가하여 입상한 경력이나 작품 내용에 관하여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까?
신영복:장원은 한번도 못했습니다만 입상은 빠지지 않고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의 백일장에서 느낀 점인데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상당히 두툼한 시작(詩作) 노트를 한 권씩 들고 와서는, 출제된 시제와 비슷한 것들을 골라서 다듬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문예반도 아니었을 뿐더러 시작 노트따위가 있을 리 없지요.
입상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시상식때까지 남아 있던 친구들이 상장과 상품을 받아서 학교에 갖다 주었습니다.
한글날 부산시 백일장에서 출제된 시제가 '지도(地圖)'였는데 제가 장원은 못했지만 분단의 아픔을 썼다고 칭찬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정운영: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했는데, 그에 관하여 들려줄 얘기가 있습니까?
신영복:고교시절에는 시인이던 국어선생님의 영향이 상당히 컸던 것 같습니다.
그 선생님은 4.19후 교원노조 활동으로 5.16이 나자 구속되기도 하신 분입니다.
생각하면 그 선생님의 과분한 애정을 받았습니다. 친구분들의 술자리에 끼어 앉히기도 해주시고 선생님이 관여하시던 주간신문에 일을 도우게도 해주시고, 문예반 소속이 아닌데도 저를 부산 마산 진주등 문화제 행사의 백일장에 출전시키기도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경제학과 진학을 강력하게 주장하신 분입니다. '강력하게'라는 표현을 쓰는 까닭은 은행 입행시험을 치르고 온 저를 불러서 이튿날의 면접을 포기하하도록 저를 설득하셨기 때문입니다.
정운영:배치고사 성적에 맞추어 기계적으로 학과를 지정하는 요즘의 진학지도와는 달리 당시 고등하교 선생님들의 지도는, 특히 그 분이 인생이나 사회에 대한 넓고 깊은 안목을 틔워준 '존경하는' 선생님일 경우에는, 학생들의 장래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하필 경제학과를 권유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신영복:그 선생님은 설명이 많지 않은 분이셨습니다. 그냥 '가라'는 것이었어요.
경제학은 돈벌어서 자기 혼자 잘 살기 위한 학문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미국의 경제원조와 군사원조가 사실은 원조가 아니라는 거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주로 경제적 빈곤의 문제에 관하여 말씀하셨고, 경제제도나 체제의 문제에 대한 말씀은 없었습니다. 저의 자형이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이었는데, 그 쪽의 영향도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정운영:60년대라면 전쟁과 기아의 연대인 50년대와, 본격적 개발의 연대인 70년대를 이어주는 가교가 되는 시기압니다.물질적인 빈곤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무척 황폐한 시대였지요. 혁명은 군부 꾸데타로 좌절되었고, 반공과 북진통일 틈바뤼에서 자유로운 사고는 숨쉴 틈이 없었고, 일본가의 국교재개 및 월남 파병 등으로 국내외가 무척 소란했습니다. 대학시절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신영복: 제가 대학에 다닌 시기가 1959년에서 1963년까지입니다. 4.19와 5.16을 재학중에 겪었습니다. 저희들의 대학시절은 한 마디로 '혁명과 반혁명'의 시절이었습니다. 해방정국의 열기가 6.25전쟁기간동안 완벽하게 초토화되고, 이후 메카시적 반공 이데올로기의 중압밑에 모든 진보적 역량이 봉쇄되어버린 상황이었습니다. 4.19를 계기로 이러한 역량의 일부가 표면으로 분출됩니다. 4.19는 부정과 부패에 대한 항거라는 형태로 표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4.19뒤 상황의 진전을 통하여 우리는 당시의 지배정권이 어떠한 세력이었으며 또 그 세력이 어떠한 계층을 억압하고 있었던가를 깨닫게 되었지요. 다시 말하자면 지배-피지배라는 사회의 계급적 구조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각 부문 운동들은 해방직후의 좌절의 경험이 아직도 극복되지 못한 상태였고 그 위에 전쟁기간 동안의 초토화화로 말미암아 그 토대가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좀 전에 "역량의 일부가 표면화되었다"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만, 이 점은 5.16이 성공 할 수 있었던 조건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5.16은 4.19를 계기로 진전된 일정한 혁명적 성과를 궤멸시키면서, 신속하게 친미 반공을 기조로한 '조국근대화'의 이데올로기로 포섭해내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저희들의 대학시절은 이를테면 '미완의'혁명과 '미완의' 좌절을 함께 겪은 시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운영:당시 지식인들의 이념적 지향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신영복:지식인 일반의 이념적 지향은 일부 진보적 인자를 논외로 한다면 아무래도 비판적 자유주의와 비반미적(非反美的) 민족주의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근대화라는 경제건설 슬로건에 포섭되거나 선건설-후통일이라는 도식으로 수렴되어 갔지요. 당시의 중산층논쟁(中産層論爭), 민족자본논쟁(民族資本論爭)등이 이러한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는 전술개념으로서는 일정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마치 이조후기 개항기의 근대화논쟁과 같이 근대화의 방향에 대한 전망이 결여되어 있었고, 그 방향을 근대화의 담당계층과 결합시키는 사고가 없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정운영:그러한 사회 상황에서 대학의 교과내용이나 연구풍토는 어떠했습니까?
신영복:경제학과의 경우는 케인즈로 대표되는 근대경제학 중심으로 커리큘럼이 짜여져 있었습니다.자본축적론과 같이 마르크스 모형에 의해서 축적구조를 설명하는 일부의 강의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풍토는 근대경제학적 관점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성장론 완전고용정책 화폐금융론등이 기조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써클중심의 학회에서는 슘페터(J.A.Schumpeter),돕(M.H.Dobb), 모빈슨(J.Robinson), 휴버만(L.Huberman)등의 이론들이 논의되었습니다. 4.19직후에는 한동안 <자본> 원강이 선택과목으로 개설되기도 하고 쎄미나 써클에서는 마르크스(Marx), 레닌(Lenin)의 저작들이 교재로 등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연구 분위기는 방금 말씀드린 대로 근대경제학 일색이었습니다. 마르크스-레닌 관련 서적은 도서관의 도서분류카드에도 없었지요.한마디로 당시 대학의 연구풍토는 기존의 지배이념을 비판하고 대항하기위한 변혁이론의 산실로서는 여러면에서 부족하였다고 생각됩니다.
정운영:당시로서는 그 이론들이 그해도 가장 '급진적'이었을 텐데요. 모리스 돕조차도 처방이 약하다고 해서 학생들이 외면했던 80년대 중후반의 상항과 비교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이 없지 않습니다. 계급이나 민족의 문제에 대해 당시의 학생들 사이에서 첨예하게 논의된 관심사가 있다면, 그 주제와 내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신영복: 당시는 1차산업의 비중이 인구구성에 있어서나 국민총생산구성에 있어서 가장 높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지만 농업문제,농민문제에 관한 논의가 상당히 활발하였습니다.
4.19이후 민족문제를 통일운동의 형태로 학생운동의 장으로 이끌어 내기는 하였습니다만 5.16이후 거의 일상화되다싶이한 극우적인 반공.반북이데올로기의 장벽을 뛰어넘기가 어려웠습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