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명인(名人)

1984년 9월 20일 대전에서

1급수들은 휴일을 이용하여 노력 봉사를 하는 일이 가끔 있읍니다.
형수님이 보시고 놀라던 그 긴 복도를 청소하기도 하고, 잡초를 뽑거나 빗물로 메인 배수로를 열기도 하고, 땅을 고르는 등 비교적 간단한 작업입니다.
저는 휴일에 작업이 있기만 하면 빠지는 일이 없읍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일을 하면 그 자체가 하나의‘학교’가 되기 마련이지만 특히 제게는 두 사람의 훌륭한‘스승’을 배울 수 있는 귀중한 기회 이기 때문에 절대로 빠지는 일이 없읍니다. 이 두 사람의 스승은 학식도 없고 집안 형편도 어려워 징역살이도 자연‘국으로 찌그러져’사는 응달의 사람입니다. 제가 이 사람을 스승으로 마음 두고 있는 까닭은‘일’이 사람을 어떻게 키워 주고 사람을 어떻게 개조하는가를 이분들의 말없는 행동을 통하여 깨닫기 때문입니다.
첫째, 이 두 사람은 일을‘발견’하는 눈이 매우 탁월합니다. 저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미처 일거리로 보이지 않는 것도 이 두 사람의 눈길이 닿으면 마치 조명을 받은 피사체(被寫體)처럼 대뜸 발견되고 맙니다. 그것도 자잘한 잔챙이를 낚아서 바지런떠는 그런 부류와는 달리, 별로 힘들이는 기색이나 생색내는 일도 없이 큼직 큼직한 일거리, 꼭 필요한 일머리를 제때에 찾아내는 솜씨란 과연 오랜 세월을 일과 더불어 살아온‘일의 명인(名人)’다운 풍모를 느끼게 합니다.
둘째로는, 이 두 사람은 일을 두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가녀린 심정’을 가지고 있읍니다. 주변에 일손을 기다리는 일거리가 있거나 삐둘어져 있는 물건이 한 개라도 있으면 그만 마음이 불편해서 견디지 못하는 그런 심정의 소유자입니다. 이분들에게 있어서 일이란 외부의 어떤 대상이 아니라 삶의 내면을 이루는 존재 조건 그 자체임을 알 수 있읍니다. 무심히 걷는 몇 발짝의 걸음 중에도 항상 무언인가를 바루어 놓고 말며, 다른 일로 오가는 중에도 반드시 무얼 하나씩 들고 가고 들고 옵니다. 잠시 동안도 빈손일 때가 없읍니다.
세째로, 이 두 사람은 여러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경우에는 언제나 제일 많은 사람이 달라붙는 말단의 바닥일을 골라잡습니다. 일부의, 더러는 먹물이 좀 들어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힘이 덜 들어서가 아니가 약간 독특한 작업상의 위치를 선호하여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일정하게 구별하려는 경향이 있음에 비하여 이 두 사람은 언제나 맨 낮은 자리, 그 무한한 대중성 속에 철저히 자신을 세우고 있읍니다. 바로 이점에서 이 두 사람은 제게 다만 일솜씨만을 가르치는‘기술자’의 의미를 넘어서‘사람’을 가르치는 사표(師表)가 되고 있읍니다. 그래서 저는 이 두 사람이 걸레를 잡으면 저도 걸레를 잡고, 이 두 사람이 삽을 잡으면 저도 얼른 삽을 잡습니다. 이분들의 옆에 항상 제 자신의 자리를 정함으로 해서 깨달은 사실은 여러 사람들 속에 설 때의 그 든든함이 우리를 매우 힘있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교편을 잡으시던 부모님 슬하에서 어려서부터 줄곧 학교에서 자라 노동의 경험은 물론, 노동자들과의 생활마저 부족했던 제게 징역과 징역 속의 여러 스승이 갖는 의미는 실로 막중한 것이 아닐 수 없읍니다.
바다가 가장 낮은 자리에서 그 큼을 이루고, 꽃송이가 다발을 이루어 큰 꽃이 되는 변증법의 비밀이 실은 우리의 가장 비근한 일상의 노동 속에 혼전으로 있는 것임에 새삼 우리들 자신의 맹목(盲目)을 탓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보내 주신 책 두권은 열독이 허가되지 않아 읽지는 못하였읍니다만 보내 주신 마음은 잘 읽고 있읍니다. 사람도 물건도 출입이 어려운 마을에 살고 있음을 알겠읍니다.
1급수 옥외 접견(가족 좌담)은 9월 28일(금) 12시에 있을 예정입니다. 따로 교무과에서 통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아버님께서 먼 걸음 하시지 않도록 주선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그만이라도 덜 바쁜 식구가 마음 가볍게 다녀가시는 그런 접견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용이·주용이, 그리고 형수님의 가을을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