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색과 문신

1983년 11월 22일 대전에서

월간지「자연(自然)」에는 특집으로‘벌레들의 속임수’가 계속 연재되고 있는데 지난 달에는 애벌레(幼蟲)와 나방들의 문양과 색깔에 관하여 소개하고 있읍니다.
애벌레를 먹이로 하는 소조(小鳥)들은 애벌레가 눈에 띄기만 하면 재빨리 쪼아먹습니다. 그러나 소조가 애벌레를 보는 순간 공포를 느끼거나 과거에 혼찌검이 난 경험이 연상되는 경우에는 일순 주저하게 되는데, 이 일순의 주저가 애벌레로 하여금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애벌레들은 오히려 소조를 잡아먹는 맹금류(猛禽類) 등 포식자(捕食者)의 눈을 연상시키는 안상문(眼狀紋)을 등허리의 엉뚱한 곳에 그려놓고 있거나 포식자가 입을 벌릴 때 나타나는 구내색(口內色)을 연상시켜 깜짝 놀라게 하는‘경악색(驚愕色)’을 몸에 입고 있읍니다.
올빼미나 매의 눈을 몸에 그려놓고 있는 놈, 몸을 움츠려 뱀의 머리 모양으로 둔갑하는 놈, 맹금의 무늬를 빌어입고 있는 놈, 구내색으로 새빨갛게 단장한 놈……. 수천만 년(?)에 걸쳐 쌓아온 벌레들의 지혜가 놀랍기만 합니다.
부모의 보호가 없음은 물론, 자기자신을 지킬 힘도, 최소한의 무기도 없는 애벌레들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 궁이해 낸 기만(欺瞞), 도용(盜用), 가탁(假託)의 속임수들이 비열해 보이기보다는 과연 살아가는 일의 진지함을 깨닫게 합니다.
교도소에는 문신을 한 사람이 많습니다. 전과(前科)가 한두 개 더 되는 사람이면 십중 팔구 바늘로 살갗을 찔러 먹물을 넣은 소위‘이레즈미(人墨)’를 하고 있읍니다. 용, 호랑이, 독거미, 칼 등 무시무시한 그림이나 필살(必殺), 일심(一心) 등 원한이나 독기(毒氣) 풍기는 글을 새겨놓고 있읍니다.
이러한 문신은 보는 사람들을 겁주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애벌레들의 안상문이나 경악색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읍니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는‘돈이나 권력이 있든지 그렇지 못하면 하다못해 주먹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지극히 단순화되 정곡을 찌른 달관(達觀)을 서투른 문신은 이야기해 주고 있읍니다.
사회 속의 거대한 메카니즘 속에서, 지구의 자전(自轉)처럼 개인이 느낄 수 없는 엄청난‘힘’들의 틈바구니 속에서‘종이 호랑이’만도 못한 이 서투른 문신이 이들의 알몸을 어떻게 지켜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불행한 사람들의 가난한 그림이다.
하루의 징역을 끝내고 곤히 잠들어 고르게 숨쉬는 가슴 위에 사천왕(四天王)보다 험상궂은 얼굴로 눈떠 있는 짐승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한 마리의 짐승을 배워야 하는 그 혹독한 처지가 가슴을 저미는 아픔이 되어 가득히 차오릅니다.
주용이 아파서 입원하였다니 깜짝 놀랐읍니다. 아버님 말씀이 곧 퇴원한다니 그만한가 생각됩니다. 아픈 몸도 몸이려니와 그 어린 마음이 받은 정신적 충격을 어떻게 소화해 가는지 염려됩니다. 병상(病床)의 경험이 주용이의 정신의 성숙에 값진 계기가 되도독 형수님의 차분하신 이지(理智)를 믿습니다.
어머님 지금쯤 퇴원하셨는지, 지난 번 가족 좌담회는 스산한 느낌이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