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과 발전

1983년 9월 19일 대전에서

말복날 점심 때 악대 부원들이 토끼고기를 보내왔읍니다. 악대 실습장에서 기르던 토끼를 잡아서 주전자에다 끊인 소위‘토끼찌개’입니다. 서화반 아홉 식구 중에서 반은 먹지 않고 반은 맛있게(?) 먹었는데, 저는 작년 겨울과는 달리 금년은 먹은 쪽입니다. 저녁에 악대부원들이 입방(入房)하여 다들 나를 먹지 않은 쪽으로 꼽다가 먹은 게 드러나자. 어떤 사람은‘타락’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발전’이라 하였읍니다. 제 자신도 이를 발전이라고 치고 있는데, 아침 나절 토끼 두 마리를 잡느라 장정 여섯 명이 달려들어 법석을 떨던 도살(屠殺)의 이야기는 난생 처음 먹은 뱃속의 토끼고기를 몹시 불편하게 하였읍니다.
[맹자(孟子)]의 곡속장에 토끼는 아니지만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읍니다. 제선왕(齊宣王)이 어느 날 흔종을 하기 위해 재물로 끌려가는 소를 목격하고는‘벌벌 떨면서 죄없이 사지로 끌여 가는 소가 애처로와’소를 양으로 바꾸라 하였읍니다. 이는 재물을 아끼어 큰 것을 작은 것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하였으므로 양은 참을 수 있으나 소는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여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높이 사서 제선왕에게서 보민(保民)의 덕(德)을 보았던 것입니다.
저의 경우는 작년 겨울의 토끼고기는 먹지 않았고 금년 여름의 토끼고기는 멋었는데, 제선왕의 경우와는 반대로 작년 겨울의 토끼는 보지 못하였고 금년 여름의 토끼는 제가 6공장에서 새끼 두 마리를 손수 얻어다가 건네 주었을 뿐 아니라 운동 시간에도 가끔 토끼장을 찾아보기까지 한 것입니다. 왕실 궁정(宮廷)의 한가로운 인의(仁義)가 누항(陋巷)의 조야(粗野)한 현실에 통할 리도 없고, 또 중토끼 두 마리를 스무 명이 나누어 먹은 찌개가 피가 되고 살이 될 리도 없고 보면 토끼에 얽힌 우리의 이야기를‘보민(保民)의 덕(德)’이나‘보신(補身)의 욕(慾)’이란 개념으로 환원해버리기에는 훨씬 복잡한 내용을 하고 측은지심은 대개 죽음과 관련되는 것에서 민감하게 촉발되는 것이지만, 사실은 살아가는 문제, 특히 선량하게 살아가는 문제와 더욱 깊숙이 관련되는 것이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그것의 감상적 차원을 뛰어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머니님의 평가가 염려되기는 하지만 어쨌든‘타락’보다는‘발전’이라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마음에 듭니다.

청신(淸新)한 가을, 형수님의 발전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