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동(還童)

1982년 6월 5일 대전에서

5월 24일 및 5월 30일자 하서와 함께 서전록(書展錄), 옥당지(玉唐紙), 평론집 모두 잘 받았읍니다.
아버님의 자상하신 옥바라지에 비해 이렇다 할 진척이 없는 제 자신이 새삼 부끄러워집니다. 그러나 이 부끄러움이 때로는 다음의 정진을 위한 한 알의 작은 씨앗이 되기도 한다는 것으로 자위하려 합니다.
여의치 못한 환경에서 글씨 쓰는 저희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차마 발길을 끊지 못하게 하는지 정향 선생님께서는 신도안(新都安) 그 먼길을 마다 않으시고 벌써 넉 달째 와 주십니다.
정향 선생님의 행초서(行�書)를 보고 있노라면 과연 글씨가 무르익으면 어린아이의 서투른 글씨로‘환동(還童)’한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아무렇게나 쓴 것 같이 서투르고 어수룩하여 처음 대하는 사람들을 잠시 당황케 합니다. 그러나 이윽고 바라보면 피갈회옥 장교어졸(被褐懷玉藏巧於拙), 일견 어수룩한 듯하면서도 그 속에 범상치 않은 기교와 법도(法道), 그리고 엄정한 중봉(中鋒)이 뼈대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멋이나 미(美)에 대한 통념을 시원하게 벗어버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대범함이 거기 있읍니다. 아무리 작게 쓴 글씨라도 큼직하게 느껴지는 넉넉함이라든가 조금도 태(�)를 부리지 않고 여하한 작의(作意)도 비치지 않는 담백한 풍(風)은 쉬이 흉내낼 수 없는 경지라 하겠읍니다.
그것은 물이 차서 자연히 넘듯 더디게 더디게 이루어지는 천연함이며, 속이 무르익은 다음에야 겨유 뺨에 빛이 내비치는 실과(實果) 같아서 오랜 풍상을 겪은 이끼 낀 세월이나 만들어낼 수 있는 유원(幽遠)함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글씨로써 배워서 될 일이 아니라, 사물(事物)과 인생에 대한 견해 자체가 담담하고 원숙한 관조(觀照)의 경지에 이르러야 가능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결국, 글씨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이며, 도(道)의 가지에 열리는 수확이 아니라 도(道)의 뿌리에 스미는 거름 같은 것이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은 모난 감정에 부대끼고 집념의 응어리를 삭이지 못하고 있는 저에게 정향 선생님의 어수룩한 행초서가 깨우쳐준 것은 분명 서도(書道) 그 자체를 훨씬 넘어서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