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1년, 긴 하루

1977년9월7일 대전에서

제가 편지를 올린 바로 그날, 아버님의 하서 두 통을 함께 받았읍니다.
아버님의 태백산(太白山) 등반기(登攀記)를 읽고 저희들은 아버님의 등산 실력에 경탄을 금치 못하였읍니다. 해발 1천 5백 46미터의 망경봉을 4시간의 야간 등반으로 오르셨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읍니다. 젊은이들의 번뜩이는 젊음과 더불어 태백의 준령에 올라 동해의 일출(日出)을 굽어보시는 아버님의 정정하신 기력과‘젊음’이 일출인 듯 선연합니다.
이곳의 저희들은 호연(浩然)한 등반과는 대조적으로, 열리지 않는 방형(方形)의 작은 공간 속에서 내밀한 사색과 성찰의 깊은 계곡에 침좌(沈座)하고 있는 투입니다.
‘1년은 짧고 하루는 긴 생활’, 그렇게 힘들게 살아온 나날도 돌이켜보면 몇 년 전이 바로 엊그제같이 허전할 뿐, 무엇 하나 담긴 것이 없는 생활, 손아귀에 쥐면 한 줌도 안되는 솜사탕 부푼 구름같이 생각하면 참으로 약소하기 짝이 없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비록 한 줌이 안된다 해도 그 속에 귀한 경험의 정수(精髓)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끝내 ‘약소(弱小)’할 수만은 없는 생활이기도 합니다. 그 속엔 우선‘타인에대한 이해’가 담겨 있읍니다.
우리는 거개가 타인의 실수에 대해서는 냉정한 반면 자신의 실수에 대하여는 무척 관대한 것이 사실입니다. 자기자신의 실수에 있어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 우여곡절, 불가피했던 여러 사정을 잘 알고 있음에 반하여, 타인의 그것에 대하여는 그 처지나 실수가 있기까지의 과정 전부에 대해 무지하거나 설령 알더라도 극히 일부밖에 이해하지 못하므로 자연 너그럽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읍니다. 그러나 징역 속의 동거(同居)는 타인을 이해하게 해줍니다.
같은 방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을 꼬박 마주 앉아서, 심지어 상대방의 잠꼬대까지 들어가며 사는 생활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랜 동거인에 관한 한 모르는 것이 거의 없읍니다. 성장과정, 관심, 호오(好惡), 기타 사소한 습관에 이르기까지 손바닥 보듯 할 뿐만 아니라 하나하나의 측면들을 개별로서가 아니라 인간성이라는 전체 속에서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도시의 아스팔트 위 손시린 악수 한두 번으로 사귀는 커피 몇 잔의 시민과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는 오랜 시간과 노력으로 모든 것을 열어놓은 자기 속으로 타인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이 열려 있는 타인의 내부로 들어갈 수 있읍니다. 타인을 자신만큼 알기에 이릅니다. 우리는 타인에게서 자기와 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남는 차이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차이’에 대한 이해없이 타인에 대한 이해가 충분한 것이 될 수는 없으며, 그 삶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이 그의 경험을 자기 것으로 소화할 수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저희들은 이 실패자들의 군서지(群捿地)에서 수많은 타인을 만나고, 그들의 수많은‘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가능성 속에 몸담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