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끝난 여름에

1977년7월27일 대전에서

7월 9일자 하서와 우송해 주신 안경 잘 받았읍니다. 도수와 크기도 꼭 맞습니다.
약한 돋보기 안경은 40대에 쓰는 것이라 하여 흔히 40경(鏡)이라고 한다는 말을 듣고, 저는 저에게 40경을 보내 주시는 아버님의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안경 알을 닦을 때 거기 어른거리는 얼굴을 만나게 됩니다. 40을 불혹(不惑)이라 합니까.
오늘은「주역(周易)」을 보다가 슬며시 치기(稚氣)가 동하여 국어 사전의 페이지를 기초삼아 이위화(離爲火)의 점괘를 얻었읍니다. 상전(象傳)에 시이축빈우길야(是以畜牝牛吉也)라 하여 암소처럼 유화(柔和)해야 길하다고 했읍니다.「주역」의 괘사 효사(卦辭爻辭)가 어느 것 하나 이현령 비현령(耳懸鈴鼻懸鈴) 아닌 것이 있겠읍니까만 동양 사상을 서양의 그것과 구별케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유(柔)를 강(剛)보다 선호하는 태도, 이를테면 우공이산(愚公移山)과 같이 우매할 정도의 광원(廣遠)한 기량(器量)이 그런 게 아닐지 모르겠읍니다.

저희들이 있는 거실(居室) 바로 창 바깥에 백여 분(盆)의 국화장(菊花場)이 있읍니다.

개화불병백화총 독립소리의무궁
開花不倂白花叢獨立梳離意無窮
영위지두포향사 하증취타북풍중
寧爲枝頭抱香死何曾吹墮北風中

봄 여름 내내 눈감고 있다가 더디 상강(霜降)에야 꽃을 피우은 국화는 고인(古人)의 말처럼 은자(隱者)임에 틀림없읍니다. 땡볕에서 밀짚 모자 하나로 꽃가꾸기에 정성인 원예부(園藝夫)의 일손을 보고 있노라면 수유리로 이사오던 누님이 생각납니다. 세가(貰家)에 들면서도 먼저 화초부터 심고 가꾸던 누님의 마음씨, 그 화분 같은 마음속에서 꽃처럼 자라던 꼬마들이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