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대를 생각하며

1988년4월1일 전주에서

3월 24일자 아버님 하서 잘 받았습니다.
어머님을 비롯하여 가내 두루 평안하시다니 반갑습니다. 이곳의 저희들도 이제는 긴 겨울을 지내놓고 건강하게 있읍니다.
아버님께서 자세히 소개하신 우이동 새 집은 매우 흐뭇한 소식입니다. 지금은 물론 많이 변하였겠지만 우이동은 토색(土色)이 밝고 산수(山水)가 빼어날 뿐아니라 금강산에서부터 달려온 광주 산맥의 끝가지가 도봉(道峰)과 북한(北漢)으로 나뉘면서 그 서쪽과 북쪽을 안온하게 감싸주는 땅으로서 가히 장풍향양처(藏風向陽處)라 할 수 있읍니다.
비단 이러한 지세나 경관뿐만 아니라 출가 외인이긴 하지만 바로 이웃에 지성으로 꽃을 가꾸는 큰 누님이 있고, 머지 않은 수유리에 또한 작은 누님이 있어서 마치 가족들이 다시 한데 모이는 듯 마음 든든합니다. 그리고 출입시마다 지나게 될 4·19 묘소도, 자칫 무심하기 쉬운 저희 교우(交友)들이 묻혀 있어서 해마다 그날이 오면 친구들과 함께 찾아가서, 저만치 병줍는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헌주(獻酒)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4·19는 동엽(東曄)의 싯귀처럼 겨냥이 조금 높아서 모자를 쓴 것이었지만 그날의 함성은 50이 다된 저희들의 가슴에 지금도 살아서 번뜩이는 정신입니다.
우이동은 역시 백운(白雲), 국망(國望), 인수(仁壽)의 수려한 3봉을 빼놓을 수 없읍니다. 아버님께서는 이태조의 시를 적어 주셨읍니다만 제게도 영재(寧齋) 이건창(李建昌)이 삼각산 백운대에서 지었다는 싯귀가 기억납니다.

운부재하천상정 해탁무서일정장
雲浮在下天常靜海柝無西日正長
(구름이 아래에 떠 있으니 하늘은 항상 고요하고
바다가 터져 서쪽이 없으니 날이 아주 길어라.)

방에서 바라보이는 삼봉의 탈속(脫俗)한 자태는 생각만 해도 일거에 서울의 홍진(紅塵)을 씻어버리고 인경(人境)에서도 지편(地扁)함을 느끼게 하고도 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3봉 중의 하나인 백운대를 수년 전에 어머님께서 오르셨다니 상상해 보면 여간 멋진 장면이 아닐 수 없읍니다. 그 봉우리 함께 바라보며 그때의 세세한 이야기 듣고 싶습니다.
강남의 형님댁과 동생집에서 먼 것이 흠이라면 흠이겠읍니다만 우리동 새집은 잠실보다는 휠씬 더 좋은 안식처를 아버님·어머님께 마련해 주리라 믿습니다.
아직 번거로운 이삿일이 남아 있읍니다만 아무쪼록 우이동 새집에 편안히 드시길 빌면서 이만 각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