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 걸음

1984년 3월 1일 대전에서

우리 방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20대의 청년과 가장 느린 50대의 노년이 경주를 하였읍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를 실험해 본 놀이가 아니라 청년은 한 발로 뛰고 노년은 두 발로 뛰는, 일견 공평한 경주였읍니다.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50대 노년이 거뜬히 이겼읍니다. 한 발과 두 발의 엄청난 차이를 실감케 해준 한판 승부였읍니다. 우김질 끝에 장난삼아 해본 경주라 망정이지, 정말 다리가 하나뿐인 불구자의 패배였다면 그 침통함이란 이루 형언키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징역살이에서 느끼는 불행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한 발 걸음이라는 외로운 보행입니다. 실천과 인식이라는 두 개의 다리 중에서‘실천의 다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실천 활동을 통하여 외계의 사물과 접촉함으로써 인식을 가지게 되며, 이를 다시 실천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그 진리성(眞理性)이 검증되는 것입니다. 실천은 인식의 원천인 동시에 그 진리성의 규준이라 합니다.
이처럼‘실천→인식→재실천→재인식’의 과정이 반복되어 실천의 발전과 더불어 인식도 감성적 인식에서 이성적 인식으로 발전해 갑니다. 그러므로 이 실천이 없다는 사실은 거의 결정적인 의미를 띱니다. 그것은 곧 인식의 좌절, 사고의 정지를 의미합니다. 흐르지 않는 물이 썩고, 발전하지 못하는 생각이 녹슬 수밖에 없는 이치입니다.
제가 징역 초년, 닦아도 닦아도 끝이 없는 생각의 녹을 상대하면서 깨달은 사실은 생각을 녹슬지 않게 간수하기 위해서는 앉아서 녹을 닦고 있을 것이 아니라 생각 자체를 키워나가야 한다는 사실이었읍니다. 요컨대 일어서서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랑 많이 일굴수록 쟁깃날은 빛나고, 유수봉하해(流水逢河海), 흐르는 물은 바다를 만난다는 너무나 평범한 일사의 재확인이었읍니다만 이것에 제게 갖는 뜻은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읍니다. 그러나 막상 일어나서 걷고자 할 경우의 허전함, 다리 하나가 없다는 절망은 다시 그 자리에 주저 앉게 됩니다.
징역 속에 주저앉아 있는 삶들이 맨 처음 시작하는 일이 책을 읽는 일입니다. 그러나 독서는 실천이 아니며 독서는 다리가 되어 주지 않았읍니다. 그것은 역시 한 발 걸음이었읍니다. 더구나 독서가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까닭은 그것이 한 발 걸음이라 더디다는 데에 있다기보다는‘인식→인식→인식……’의 과정을 되풀이하는 동안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현실의 튼튼한 땅을 잃고 공중으로 공중으로 지극히 관념화해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모든 불구자가 그러듯이 목발을 짚고 걸어가기로 작정하였읍니다. 제가 처음 목발을 삼은 것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 즉‘과거의 실천’이었읍니다.
목발은 비록 단단하기는 해도 자기의 피가 통하는 생다리와 같을 수 없기 때문에 두 개의 다리가 줄곧 서로 차질을 빚어 걸음이 더디고, 뒤뚱거리고, 넘어지기 일쑤였읍니다. 그러나 이 어색한 걸음세도 세월이 흐르고 목발에 손때가 묻으면서 그럭저럭 이력이 나고 보속(步速)과 맵시(?)가 붙어 갔읍니다.
그런데 이 경우의 소위 이력이란 것이 제게는 매우 귀중한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발이 생다리를 닮아서 이루어진 숙달이 아니라 반대로 생다리가 목발을 배워서 이루어진 숙달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나의 인식이 내가 목발로 삼은 그 경험들의 임자들의 인식을 배우고 그것을 닮아감으로써 비로소 걸음걸이를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목발의 발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생다리의 발전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사전(事前)에는 반대로 예상했던 것이었던 만큼 실로 충격적인 것이었읍니다.
더욱 놀라은 것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징역 동료들의 경험들이 단지 과거의 것으로 화석화(化石化)되어 있지 않고 현재의 징역 그 자체와 튼튼히 연계되거나 그 일부를 구성하고 았으므로 해서 강렬한 현재성(現在性)을 띠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실천이란 죽은 실천이 아니라 살아서 숨쉬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의 발견은 나의 목발에 피가 통하고 감각이 살아나는 듯한 감동을 안겨 주는 것이었읍니다.
실천이란 반드시 극적(劇的) 구조를 갖춘 큰 규모의 일만이 아니라 사람이 있고 일거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혼전만전 널려 있다는 제법 익은 듯한 생각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사람은 각자 저마다의 걸음걸이로 저마다의 인생을 걸어가는 것이겠지만. 땅을 박차서 땅을 얻든. 그 위에 쓰러져 그것을 얻든, 죽어서 땅 속에 묻히기까지는 거대한 실천의 대륙 위를 걸어가기 마련이라 생각됩니다.
3월, 길고 추웠던 겨울이 끝나려 하고 있읍니다. 어쩌면 옥담 밑에 언 후미진 곳에 봄은 벌써 작은 풀싹으로 와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떻든 봄은 산 너머 남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발 밑의 언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어머님·아버님을 비롯하여 우용이·주용이에게 이르기까지 봄의 활기 충만하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