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몸

1982년 10월 23일 대전에서

여러 형제들 틈에서 부대끼며 자라면 일찌기 사회 관계를 깨닫게 되고, 조부모 슬하에서 옛것을 보고 들으면서 자라면 은연 중에 역사의식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3형제 이름 다 부른 다음에야 간신히 제 이름을 찾아 부르시던 할머님이나 유지(油紙)를 펴고 그 앞에 꿇어 앉아 붓글씨를 익히던 사랑채의 할아버지, 그리고 형과 다투면 형한테 대든다고 나무라시고 동생과 다투면 동생 하나 거두지 못한다고 또 야단치시던 어머님의 꾸지람도 지금 생각하면 그러한 의식의 맹아(萌芽)를 키워 준 귀중한 자양(滋養)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상당한 성장의 폭을 부여한 것 또한 사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린 시절이나 책갈피 속에서 얻은 왜소하고 공소(空疎)한 그릇에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을 채워 주는 것은 역시 생활의 현장에서 직면하는 가종의 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육순 노인에서 스물두어 살 젊은이에 이르는 스무남은 명의 식구(?)가 한 방에서 숨길 것도 내세울 것도 없이 바짝 몸 비비며 살아가는 징역살이는 사회·역사 의식을 배우는 훌륭한 교실이라고 할 수 있읍니다. 일체의 도덕적 분식(粉飾)이나 의례적인 옷을 훨훨 벗어버리고 벌거숭이의 이해(利害), 호오(好惡)가 알몸 그대로 표출됩니다.
알몸은 가장 정직한 모습이며, 정직한 모습은 공부하기에 가장 쉽습니다.
시월 하순, 가을도 이미 깊어 여기저기서 잎을 떨구는 나무는 어디론가 떠나려는 사람 같습니다.
잎이 떨어지고난 가지에 나타난 빛나는 열매가 여름 동안의 역사(役事)를 증거하고 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