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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수의(囚衣)
1979년 2월 2일 대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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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9일자 하서 받았읍니다.
그리고 지난 1월 7일자 하서도 먼저 받았읍니다만 10일의 상서(上書)에「사군자 묘법(四君子描法)」을 받았음을 말씀드렸기에 따로 답상서를 올리지 않았읍니다.
이번 겨울은 한온(寒溫)이 무상하여 앞날씨를 측량키 어렵습니다. 저희는 제일 추운 날씨를 표준하여 옷들을 입고 있읍니다.
호한에는 볼품이 없어도 솜이 든 저희들의 수의(囚衣)가 신사들의 옷보다 훨씬‘아름다와’ 보입니다.‘아름다움’이란 바깥 형식에 의해서라기보다 속내용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규정되는 법임을 확인하는 심정입니다.
서도(書道)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읍니다. 자획의 모양보다는 자구(字句)에 담긴 뜻이 좋아야 함은 물론, 특히 그‘사람’이 훌륭해야 한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작품과 인간이 강하게 연대되고 있는 서도가, 단지 작품만으로 평가되는 인간 부재의 다른 분야보다 마음에 듭니다. 좋은 글씨를 남기기 위하여 결국 좋은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는 평범한 상식이 마음 흐뭇합니다.
인간의 품성을 높이는 데 복무(服務)하는‘예술’과 예술적 가치로 전화(轉化)되는‘인간의 품성’과의 통일이. 이 통일이 서도에만 보호되고 있다고 한다면 아무래도 근묵자(近墨者)의 자위이겠읍니까.
요즘은 다시「논어」를 들었읍니다.
외풍이 센 방에서 새벽이 일찍옵니다. 새벽 창 밑에 앉아 고인(古人)의 지성을 읽어 봅니다.
이우천하지선사위미족 우상론고지인
以友天下之善士爲未足 又尙論古之人
(같이 사는 천하의 착한 사람과 사귀는 것도 부족하여 책 속에 옛 사람과도 벗을 삼는다.)
「맹자」의 일절이 상기됩니다. 항상 생활 속에서 먼저 깨닫기도 하고 독서가 결코 과욕이 되지 않도록 부단히 절제하고 있읍니다.
아직 손시려 글씨 쓰지 못합니다. 종이 필요하면 말씀드리겠읍니다. 어머님 강건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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