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와 양말과 민담

1977년10월4일 대전에서

가게에 내놓은 사과알의 색깔과 굵기로 가을의 심도(深度)를 측정하던 기억이 있읍니다. 풀빛의 어린 사과가 가게의 소반 위에서 가을과 함께 커가면 사과나무가 없는 출근길에 평소 걸음이 바쁘던 도회인들도 그나마 사과 한 알만큼의 가을을 얻기도 하였읍니다.
이곳에는 물론 사과나무도 또 가게도 있을 리 없읍니다. 가끔 접견물(接見物)에서 들어오는 작고 파란 사과를 보다가 며칠 전 홍조일색(紅潮一色)의, 풍만한 구적(球積)의 사과 한 개를 받아들고 어느새 이만큼 다가선 가을에 놀라 부랴부랴 무슨 중추(仲秋)의 채비라도 서두르고 싶은 착각에 스스로 고소(苦笑)를 금치 못한 적이 있읍니다.
이곳의 우리들에게는 여름과 겨울, 덥다와 춥다의 극지(極地)가 존재할 따름입니다. 가을은 '제5의 계절', 다만 추위를 예고하는 길바쁜 전령일 뿐 더불어 향유할 시간이 없읍니다.
나는 사과를 문진(文鎭)삼아 화선지 위에 올려놓고 사과와 먹(墨), 적과 흑의 방향(芳香)에 비적비흑(非赤非黑)―청의(靑衣)의 심회를 기대어 봅니다.

계수씨께서 보낸 정육면체의 작은 소포 꾸러미는 주사위처럼 궁금했읍니다. 양말 세 켤레. 추석이었읍니다. 먼저 손에다 신어 보았읍니다. 설빔 신발을 신고 연신 골목으로 나가고 싶던 예의 그 역마벽(驛馬癖)이 짜릿하게 동하여 옵니다. 나더러 역마살이 들었다던 친구들이 생각납니다. 역마살은 떠돌이 광대 넋이 들린 거라고도 하고 길신(道神) 씌운 거라고도 하지만, 아직도 꿈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 꿈 찾아 나서는 방랑이란 풀이를 나는 좋아합니다. 하늘 높이 바람찬 연(鳶)을 띄워 놓으면 얼레가 쉴 수 없는 법, 안거(安居)란 기실 꿈의 상실이기 쉬우며, 오히려 방황의 인고 속에 상당한 분량의 꿈이 추구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히미아의 맑은 수정(水晶)'은 멀고 머흔 유랑이 키워낸 열매라고 믿고 싶습니다.

요즈음은 민담 선집(民譚選集)을 몇 권 구하여 읽고 있읍니다. 민담은 어느 천재의 소작(所作)이 아니고 우리 민족이 오랜 역사를 통해 공동으로 만들어내고 공동으로 승낙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민담은 탕약(湯藥) 같고 숭늉 같고 당산(堂山) 나무 그늘 같습니다. TV를 끄고 꼬마들에게 들려 주고 싶습니다.

잦은 편지에 드문 답장이 빚 같습니다. 금년 가을에도 월등한 수확을 빕니다.